물빛이 고운 남해의 도시, 통영.
그 중에서도 여행자들의 발길을 붙잡는 작은 언덕 마을이 있습니다.
‘동쪽 비랑’, 동피랑(東陘)은
이름처럼 바람을 타고 동쪽 언덕을 타고난 마을입니다.
한 때 철거 위기에 놓였던 이 마을은,
벽에 그려진 그림 하나, 붓질 하나로 다시 숨을 쉬게 되었지요.
언덕 위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동피랑에 발을 들이는 순간,
마치 오래된 이야기책의 한 장면에 들어선 듯한 기분이 듭니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길,
골목 사이로 내리쬐는 따사로운 햇살,
그리고 담벼락에 한가득 피어난 색색의 그림들.
벽화마을이라는 단어가 주는 평범함을 이 곳은 가볍게 넘어섭니다.
여기서는 벽이 말을 걸고, 길이 기억을 되살리며,
지나는 사람들의 마음에 조용히 흔적을 남깁니다.
어린왕자가 별을 바라보고,
고양이가 낡은 지붕 위를 걷고,
한 할머니의 따뜻한 미소가 무심히 담장을 넘어 나를 맞이합니다.
화려하지 않지만 정겹고,
복잡하지 않지만 묵직한 울림이 있습니다.
사라질 뻔했던 마을, 되살아난 풍경
동피랑은 본래 철거 대상이었습니다.
통영성의 복원 사업으로 인해 정비 대상에 포함되었지만,
마을을 지키려는 시민들과 예술가들의 작은 움직임이
결국 마을을 지키는 거대한 물결이 되었지요.
그렇게 시작된 벽화 프로젝트.
누군가는
‘허름한 골목에 그림 그린다고 뭐가 달라지겠어’라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동피랑은 보여줍니다.
사람의 손길, 마음의 붓질이 어떤 마법을 부리는지를.
그림이 하나 둘 생기고, 사람들이 몰려들고,
작은 마을에 다시 온기가 감돌며,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셔터 소리가 겹쳐 울립니다.
천천히 걷는 즐거움
동피랑은 빠르게 둘러보는 곳이 아닙니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걸어야 제맛인 곳입니다.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새로운 그림,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지요.
어느 집의 대문 앞에는 동심 가득한 물고기들이 헤엄치고,
낡은 계단 옆에는 사랑스러운 강아지 한 마리가 그림 속에서 꼬리를 흔듭니다.
햇살이 닿은 벽면에서는 색들이 반짝이며 말없이 노래를 부릅니다.
한 벽 앞에 멈춰 서면,
그림과 눈이 마주칩니다.
그저 그림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이 닿은 장면 같아
괜스레 오래도록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됩니다.
바다를 품은 언덕에서
마을 꼭대기까지 오르면, 시야가 확 트입니다.
탁 트인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곳,
그 경계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멀리 보이는 통영항과 운하, 오밀조밀한 지붕들,
그리고 그 위로 바람이 수없이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
마음 속 응어리들이 바람에 실려 흩어지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사진 속이 아닌,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되는 마을.
그것이 바로 동피랑의 힘입니다.
오래도록 남는 감정 하나
동피랑은 예쁜 그림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여행자의 마음을 조용히 감싸는 어떤 정서,
잊고 있던 기억을 툭 건드리는 따뜻한 손길 같은 곳이지요.
누군가는 연인과, 누군가는 가족과,
또 누군가는 혼자 이 곳을 찾지만
모두가 한 장면의 주인공이 되어
이 골목과 그림 사이를 천천히 걸어갑니다.
가끔은 말 없이 벽을 바라보다 웃고,
가끔은 어릴 적 추억을 꺼내며 혼잣말을 내뱉기도 합니다.
동피랑은 그런 ‘작은 감정들’에 조용히 귀 기울여 주는 마을입니다.
여행이란, 결국 마음에 남는 한 장면
동피랑에서의 하루는 그렇게 흘러갑니다.
많이 걷지 않아도 좋고,
많은 사진을 남기지 않아도 좋습니다.
그저 마을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자신의 속도를 따라 걸어보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이 마을이 속삭일 것입니다.
“다녀가줘서 고마워요.
당신 덕분에 이 골목도 오늘 더 빛났어요.”
붓 하나로 되살아난 언덕,
그리고 그 언덕을 걸으며 스스로의 마음도 되살아나는 곳.
그 곳이 바로, 경남 통영의 동피랑 벽화마을입니다.
혹시 통영에 가신다면,
이 언덕에 한 번 들러보시지 않겠어요?
당신의 마음에도 오래 남을 풍경 하나, 꼭 남겨두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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